본문 바로가기

디딤돌 사업/간행물 원고

<2016년 겨울호> 책 속에서 꿈을 키워 온, 지난 5년

<작은학교 이야기>

책 속에서 꿈을 키워 온, 지난 5

- 마을교사 최정희 / 반계분교 독서교육 책 속에서 꿈을 키워요

 





 


살다 보면 갑자기 큰 변화를 맞을 때가 있다. 나는 내가 제주로 이사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언제나 그랬듯이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해서 그 정다운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거나 혹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거나 그도 아니면 도서실에 들어서자마자 달려 나와 반겨주던 아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게 반계가 폐교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제 더 이상 수업을 만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내가 아이들이 반계분교에 있는 동안 끝까지 수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로 감사하게 되었다.

 

삼월이면 늦둥이 지인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던 네 살배기 지인이를 데리고 반계분교 독서수업을 갔다. 그 이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

 

첫째를 유치원에 입학시키면서 함께 교직원으로 다녔던 남한산초교도 작은 학교였다. 남한산의 도서실 숲 속 옹달샘은 다른 학교에 비하면 턱없이 좁은 공간이었지만, 책이라는 매개 하나로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다. 어린 지인이를 데리고 다시 작은 학교의 도서실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마음을 먹게 된 데는 아마도 그 때 그 기억들의 힘과 분교라는 이름이 주는 묘한 낭만적인 매력이 작용한 것 같다. 그러나 사서교사로서 학교의 일상에 자리 잡고 아이들을 만나는 일에서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는 방과후교사로 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학생 수가 너무 적어 학년 통합 수업을 하다 보니 밀도 있는 수업을 진행하기 힘들었다. 저학년과 고학년의 수업시간이 달라서 저학년이 먼저 한 시간 수업을 하고 난 다음에 뒤이어 고학년이 편입하는 방식은 수업의 맥이 곧잘 끊어졌다. 저학년과 고학년을 나누어 각각 한 시간씩 수업하는 식으로 갔을 때는 집중도는 높아졌지만, 수업 시간이 짧아서 표현활동을 할 시간이 모자란다는 단점이 있었다. 첫 해는 아이들과 어떻게 해서든 욕심을 내어 뭔가 만들어 내려고 애를 썼다. 몇몇은 잘 따라왔지만,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늘 쳐지고 딴전을 피웠다. 물론 매 회 생동감은 있었지만, 아이들을 따라오게 하는데 치중하느라 지치고 수업 후에 낭자한, 버려진 쓰레기들을 치우느라 한숨이 나왔다. 두 번째 해는 매번 책을 읽고 멋진 표현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아이들의 일상에 자리하는 도서실을 정비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했다.

 

먼저 아이들이 직접 지은 도서실의 새 이름인 도서관 공화국해맑은 도서관을 나무간판에 예쁘게 장식해서 나란히 걸었다. 그 다음에는 걸레를 수도 없이 빨아 먼지투성이 책들을 다 끄집어내고 책꽂이를 닦았다. 책꽂이에 주제별 안내라벨을 큼직하게 써 붙이고, 책등마다 주제별 스티커, 특히 문학 책에는 학년별, 우리/외국작품을 구분하는 스티커를 일일이 오려서 붙였다. 오랫동안 주제와 무관하게 뒤섞여있던 책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물론 처음에는 열의를 가졌던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그런 성실함을 보여주기는 힘들었기에 한동안 어깨통증을 앓으면서도 끝까지 마무리하느라 진을 뺐었다. 세 번째 해부터는 긴 호흡으로 책을 읽기 위해 그림책 위주의 수업에서 벗어나 다소 글밥이 많지만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책을 골라 오랜 시간 이야기 해주듯 읽어주었다. 인형극으로 내용을 전달하면 훨씬 집중이 잘 되었다. 한 작가의 책들을 몇 회에 걸쳐 읽고 작가의 경향을 느껴보기도 했다. 작가에게 편지도 썼다.

 

다문화가정이 대부분인 점을 고려해서 자기 부모님의 모국에 대해 알아보고 그 나라 작품을 찾아 읽고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기획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아이들의 면모를 확인하고 미리 일정을 잡아서 광고했더니 치밀하게 준비해서 나를 정말 깜짝 놀라게 했다. 찍었던 사진들을 살펴보며 새록새록 그때 그 시간들이 떠오르지만, 어찌 그 때 나눈 모든 것들이 사진 한 장에 담길 수 있을까?

 

아직 글자를 다 못 익혀서 자신감이 부족하지만 그 누구보다 아이다운 상상력이 있고 꾸밈없는 영철이, 언제나 주목 받고 싶고 뭐든지 가지고 싶은, 야무진 소희, 그리고 꼼꼼히 완벽함을 추구하는 유리아, 예전엔 말수가 너무 적었지만 지금은 터져 나오는 이야깃거리를 주체 못 할 정도로 명랑해진 해주, 헤어질 때 가장 꼭 안겨 한참을 가만히 있던 다빈이, 그다지도 산만하고 장난기가 많아 힘들게 했던 악동이었지만, 지난 수업들의 내용을 그 누구보다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는 수성이, 먹을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바느질 같이 손으로 하는 활동을 잘 하는 혜지, 거의 마지막 수업에 읽은 프린세스 이야기를 책을 좋아하는 세빈이, 자신의 빛깔을 잃지 않고 여유 있는 정안이전학 갔지만, 함께 했던 아이들 한 명 한 명 모두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간 먹을 것이라면 언제나 마다하지 않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케이크며 쿠키, 양갱, 젤리, 심지어 어느날엔가는 도시락까지 집에서 만들어 가서 나눈 음식들도 참 많았다. 그냥 사서 가져갈까 하다가도 엄마의 마음이 발동한 탓인지 내 손으로 만들어가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런 음식들로 인해 책읽기는 맛있다고 기억해주는 매개가 된다면 그 수고가 아깝지 않겠다.

 

근원적인 고민은 아이들이 책을 몰입해서 읽고 그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것에 대한 한계였다. 정성 들여 읽어야할 책보다는 이미 심심풀이로 읽기 좋은 만화와 할머니와 밤마다 시청하는 드라마의 스토리에, 그리고 스마트폰, 컴퓨터게임에 익숙한 아이들이었다. 나는 아이들 곁에 있으며 동기 부여를 주고 좋은 책을 권해줄 수는 없었다. 고작 일주일에 한번 책을 가지고 한판 논다는 인식을 줄 뿐, 내가 진심으로 주고 싶은 것들의 반에 반도 전해주기는 힘든 현실이었다.

 

독서는 강요당해서도 안 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비밀스러운 행복이기에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역시 획일적이거나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다양하게 할 여지를 많이 주고자 했을 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반 없었던 것 같아 부끄럽다.

먼 훗날, 아이들이 어렴풋하게라도 책 읽고 무엇인가를 나눈 경험이 자연스럽고 즐거운 느낌으로 기억하기만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자신의 표현이 존중되는 느낌을 받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최정희 선생님은 2012년부터 5년간 책 속에서 꿈을 키워요라는 제목으로 장곡초등학교 반계분교에서 독서 교육을 하였습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먹고 그리고 연극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34년에 문을 연 반계초등학교는 1999년에 장곡초등학교 반계분교로 되었다가, 20172월에 장곡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습니다. 반계분교를 다니던 9명 아동들은 장곡초등학교와 금당초등학교로 옮겼습니다.  


폐교를 앞둔 반계분교